조간 신문 한켠에서 크림반도 전쟁에 북한군 청년들이 동원되었다는 소식을 읽었다. 어수선한 마음으로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는데 울긋불긋 화려하게 차려입은 나무들이 환하게 반겨준다. 문득 쳐다본 하늘은 눈부시고 구름 한 점이 없이 파랗다. 1948년 4월 3일 같은 하늘 아래 제주에서는 역사의 비극을 알리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글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말이 절로 나온다. 아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글자를 글자로 읽다가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사이에서 길을 잃었으며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환상에서 헤매였다. 모호함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뚜렷해지는 신기한 경험. 그 혼란스런 과정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책을 손에서 놓치 않았던 것은 노벨상이 가진 권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며 수년간 제주 4.3사건의 고통과 함께한 저자의 혼신이 와닿기 때문이며, 어느새 나는 그의 사투에 압도되어 있었다. 여느 역사 소설 속 사건 한가운데에 놓인 다소 억지스런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경하와 인선 두 인물의 시선을 따라 마주하는 사건의 기록물을 통해 그 사건으로 인해 희생된 영혼들과 작별하지 않겠노라고저자는 말한다.
평생을 괴롭힌 불치병, 편두통을 앓고 있는 경하. 끈질기게 그를 괴롭히던 두통과 간간히 꾸는 악몽이 과거 세상과 단절된 섬마을 제주도민이 겪은 고통과 맞닿아 있다는 걸 알게된다. 죽음과 이별은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일부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무자비한 공권력에 의해 어떤 저항도 하지못한 채 짓밟혔다. 사랑하는 가족이, 마을사람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다.그러한 사실이 철저히 은폐되고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정심은 부모와 형제를 잃고 생사를 알길 없는 오빠를 평생 가슴에 묻어야 했다. 그런 엄마를 지켜보기만 할 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딸 인선은 자신의 무기력함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기에 수사는 종결되었지만 사건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그 상처는 남은 이들의 상처가 되어 정심에서 인선에게로 그리고 인선의 친구 경하의 아픔이 되었다. 우리가 이들의 삶을 제대로 모르는 사이 그 사건은 오랫동안 왜곡되고 외면되어 왔다. 내내 답답했다. 우리의 무관심이 희생자들의 삶을 더욱 처참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끄럽다.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잊고 살았다는 게. 나는 그들이 혼자 겪게 두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한다. 모두의 일이다. 이들의 서러운 삶이 곧 우리의 역사이고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이 저자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한. 그래서 감사하다. 그들을 조명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준 작가님께.
한강 작가는 지극히 사랑에 대한 소설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나는 읽는 내내 우울했지만 동시에 가슴 한켠에서 뜨거운 불꽃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무심했던 역사에 진정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어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더는 듯하기도 했다. 앞으로 전 세계인과 우리의 관심사를 공유할 상상을 하니 벌써 짜릿하다. 작가의 바람 대로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지난 상처를 어루만지고 충분히 애도하며 그것과 끝내 작별하지 않았으면 한다.. 파란 하늘 아래 오늘도 지구 한쪽 '평화'를 위장한 살상에 희생되고 있는 그들을 위해. 그 어쩔 수 없었던 모든 것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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